아무리 척박하고 쫓기는 일상일지라도 열심히 사랑하는 일만큼은 까먹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잊고 지내던 장소의 공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 평범한 일상들이 가장 큰 형태의 행복에 비등이 견주어지는 것. 음악을 듣는다는 건 그런 것.
동굴 일상
“제 일상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매일이 같습니다. 일어나서 동굴로 나와(주인장은 이 공간을 동굴이라 부른다) 미리 사둔 음반들을 걸어두고 책을 보며 오후를 지냅니다. 매일 7, 8장 사이의 고전 음반을 듣고, 책은 300여 페이지 부근을 읽어요. 영업이 시작되는 늦은 7시가 되면 동굴 문을 열고 영업이 끝나는 새벽 1시가 지나면 낮에 미처 못 들은 음반을 다시 걸고 밀린 책을 읽고, 잤다가 낮에 깨는.”
주인장은 음악과 책 그리고 요리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동굴에 켜켜이 쌓인 책과 공간의 밀도를 촘촘히 채우고 있는 각종 LP와 CD들 그리고 치즈 크래커가 그 사실을 조용히 방증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부터 모아 온 LP를 세상에 가지고 나오기로 한 게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음악 감상실 ‘제주소년블루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곳은 음악 들으면서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형태의 공간이야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마는, 역시 남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요즘은 어디서나 누구나 컴퓨터에 연결된 파일로 음악을 트는데, 이곳은 음반이 없으면 틀지 않는다는 것. 무엇보다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시대 불문 희귀 레코드를 가장 낭만적인 플레이어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LP와 불상사
LP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LP는 지금의 부모 세대에게 익숙한 음악 저장 매체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적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고, 음반시장도 작아서 다른 나라의 팝이나 클래식 음반이 직수입되지도 않는 조악한 환경이었을뿐더러 마스터 테이프(음반 제조 공정에서 마지막 단계)가 원형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설령 들어온다 하더라도 이미 사용감 있는 낡은 마스터 테이프가 들어왔다. 그나마 이 상황도 좋은 상황이고 대부분은 일명 빽판이라고 불리었던 불법 해적판을 구입하여 듣곤 했다. 그래서 LP 하면 잡음에 지지직거려야 제맛으로 아는 불상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원래 LP는 관리가 잘 되어 있으면 잡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소수의 문화
LP를 전문적으로 들을 수 있는 장소는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지금도 LP를 찍어내는 공장이 있다. 단지 한 곳밖에 없으며, 한 번에 500장이라는 극소수의 양만 생산된다곤 하지만 말이다. 그 말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500여 명의 극소수의 사람들만 여전히 이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주인장에게 시대가 잊어가는 것을 향유한다는 것엔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물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80년 중반 즈음에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들어갔는데, 당시 중학교로 넘어가기 전 담임선생님이 올라가면 이제 더 이상 연필을 가지고 다니면 안 되고, 다들 볼펜을 써야 하니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했어요. 어린 마음에 필통에 볼펜을 색깔별로 넣어서 다녔는데, 어느 날 친구 녀석의 필통을 보니 여전히 잘 깎인 연필들이 고스란히 이단 필통 아랫부분에 넣어져 있더군요. 잊어가는 것(혹은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에 달린 게 아닌가 합니다.”
the bom volume 05 <Classic Summer> '음악 감상실 '제주소년블루스'' 중에서
글 라어진 / 사진 김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