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즈를 구하러 달나라로 가자
월레스와 그로밋
Wallace & Gromit: A Grand Day Out, 1989
달나라로 치즈를 구하러 떠나는 이야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이 작품은 런던에 사는 독신 남성 ‘월레스’와 그의 애완견 ‘그로밋’이 벌이는 좌충우돌 모험담을 그린다. 발명을 좋아하는 월레스와 바흐의 음악을 즐겨듣고 뜨개질이 취미인 그로밋. 둘은 서로에게 더없이 좋은 친구다(알고 보면 월레스보다 어른스러운 그로밋이다). 치즈를 무척 사랑하는 월레스답게 집에는 온통 치즈 그림 액자가 걸려있고, 치즈 월간지가 놓여있다. 그러던 어느 날 월레스는 벽장에 치즈가 모두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그로밋과 달나라로 치즈를 구하러 가기로 하는데(노란 달을 치즈로 생각하고 그곳으로 피크닉을 떠나는 생각이 무척 순수하고 귀엽다). 우여곡절 끝에 직접 만든 로켓을 타고 달에 착륙한 월레스와 그로밋. 돗자리를 펴고 집에서 챙겨온 찻잔과 크래커를 내어 피크닉을 즐긴다. 쓱싹쓱싹 달 표면의 치즈를 한 움큼 잘라내어서는 크래커에 얹어 먹음직스럽게 먹는 월레스. 그 모습을 보며 베이지색 크래커에 두툼한 치즈를 곁들여 먹는 맛은 어떤 맛일까, 언제나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 어릴 적 한 번쯤은 가져보았던 달에 대한 호기심을 가장 귀여운 방식으로 풀어낸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 영화가 주는 특유의 아늑함과 편안함이 토요일 오후를 연상시킨다.
─
칠과 이분의 일층에서
존 말코비치 되기
Being John Malkovich, 1999
타인의 몸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법한 상상이다. 영화 ‘존 말코 비치되기’는 지극히 단순한 그 제목과는 달리 기괴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영화였다. 꼭두각시 인형 예술가로 등장하는 ‘크레이그 슈와츠’는 어느 회사의 면접을 보기 위해 한 뉴욕시의 한 빌딩으로 간다. 7과 1/2층(7층과 8층 사이)에 위치한 이 회사는 천장이 매우 낮아 모두가 허리를 잔뜩 굽히고 다녀야 하는데, 이러한 비현실적인 공간 설정이 영화 전반에 깔린 기괴함을 증폭시킨다. 그러던 어느 날 크레이그는 우연히 책장 뒤의 정체 모를 구멍을 발견하게 되고, 그곳이 존 말코비치라는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 통로는 이내 상업적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는데, 다른 이가 되어 보고 싶었던 이들의 성원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15분간 존 말코비치의 의식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신도 몰랐던 성적 정체성을 찾은 이들, 존 말코비치의 몸에 들어가 단순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움직이고 다르게 느껴보고 싶었던 사람들. 영화는 너무나 다양한 질문거리를 던지고 있어 모두를 언급할 수는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타인의 삶은 언제까지나 타인의 삶이라는 것, 빌린 인생은 언젠가는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살아간다는 상상은 상상에 그쳐야 즐거운 것이 아닐까.
─
가장 보통의 존재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Turtles swim faster than expected, 2005
평범한 삶이라는 건 나쁜 쪽일까, 좋은 쪽일까. 때로는 평범한 일상에 안정감을 느꼈지만, 때로는 권태를 느꼈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를 처음 보게 된 건 평범한 일상에 싫증이 날 즈음의 일이었다. 제목부터 비범한 느낌을 주는 이 영화라면 잠시나마 특별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란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주인공 ‘스즈메(우리말로 참새라는 뜻)’는 평범하다 못해 어중간한 삶을 사는 인물이었다. 보통의 키와 보통의 몸무게, 평범한 헤어스타일과 옷, 하루 일과라 함은 하루 한 번 보는 장과, 때맞춰 거북이 밥 주기가 전부인 그런 인물. 이렇듯 가진 이름만큼이나 평범하고 흔한 일상을 살아온 스즈메다. 그런 그녀의 삶은 우연히 계단 밑에 붙어있던 손톱만 한 ‘스파이 광고’를 발견하게 되면서 판국을 달리하게 되는데. 오히려 튀지 않는 사람이 스파이로서는 제격이라며 스파이 권유를 받게 된 스즈메. 그렇게 활동자금 500만 엔을 건네받아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내려진 첫 임무는 공교롭게도 ‘가능한 한 평범하게 살 것!’ 마트에서 3만 원으로 최대한 평범한 물품만을 산다거나, 레스토랑에서는 웨이터가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평범한 음식만 주문한다거나. 뭐 이런 것쯤이야 늘 해오던 일이라 거뜬하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평범해지려 노력하니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평범했던 일상을 특별히 여기다 보니 더는 평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특별했다. 스즈메가 그랬듯, 조금만 시각을 바꾸어 일상을 바라보자. 또 누가 아는가.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칠지.
─
인생의 시나리오
트루먼쇼
The Truman Show, 1998
“네 인생이 사실은 전부 계획된 것 같다는 생각해 본 적 없어?” 언제부턴가 자신의 인생이 연출되고 있음을 느낀 ‘트루먼’이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물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돌아가신 아빠를 길에서 스친 것도, 하늘에서 뜬금없이 떨어진 방송국 조명, 어색하리만큼 과하게 생활용품을 소개하는 아내의 행동, 마치 자신의 이동 경로를 보고하는 듯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수상한 대화들, 엘리베이터 안의 의문의 세트장까지.
그렇다. 그는 하루 24시간 생방송 되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다. 220개 나라의 사람들이 그의 탄생부터, 첫걸음마, 첫 입학, 첫 키스의 순간까지 함께해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물에 대한 공포증을 가지게 된 것부터 보험회사에 근무하게 된 일, 심지어 메릴이란 여인과 결혼하게 된 일 역시 모두 짜인 각본에 의한 것이었다. 여태 살아왔던 모든 공간이 스튜디오였고, 의지하고 사랑해왔던 모든 주변인은 배우였다면 그로부터 오는 상실감은 너무도 클 것이다(한편으론 평생 내가 아닌 누군가를 연기하며 살아가야 하는 배우들 역시 가엾다는 생각이다).
결국, 30년간 살아온 스튜디오를 떠날 용기를 낸 트루먼. 그토록 두려워했던 물 공포증을 극복하고 바다의 끝, 아니 스튜디오의 끝에 선다. 그곳은 평생을 살아온 세상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의 경계다. 그곳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트루먼이 건네는 마지막 인사를 잊을 수 없다. “오늘 못 볼지도 모르니 미리 인사해두죠.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the bom volume 06 <새로운 쓰임에 관하여> '이상한 나라의 상상' 중에서
글 라어진 / 일러스트 권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