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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각존자의도력진헌

by 월간김현청 posted Jan 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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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覺尊者 金守省(信眉大師)의 道力

                                     金振憲

守省은 金訓의 長子로 西記 1403年(朝鮮 太宗3年 癸未)에 태어났다. 始祖 金令貽가 高祖, 金吉元이 曾祖, 金宗敬이 祖父이시다. 태어날 때부터 왼손 손바닥에 임금 王字가 손금에 있어 父母와 三寸들은 크나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新羅때부터 李朝에 이르는 동안 그런 사람은 나라에 逆賊이 된다하여 國法에 의해 잡아 죽였기 때문에 죽음을 免하려고 배안 병신 노릇을 하느라 항상 손가락을 오그리고 주먹을 쥐고 살았던 것이다.

*용산 오야골(지금의 고야골-상용리 안 골짝)에 이를 뒷밭침 하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조선 태종 임금 때에 천기를 보는 역관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저 남쪽 하늘 아래에 커다란 인물이 태어나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 아이를 그냥 두면 전하에게 큰 화근이 될 것이 틀림없으니 지금 바로 처리하심이 마땅합니다"하고 " 지금 그 인물이 그 곳에 있으면 화근이요 만약 집을 떠나 중이 되었으면 전하께 도움이 될 인물이 될 것입니다"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이 그냥 있을리 없다. 이름 있는 자객을 불러 즉시 남쪽으로 보내며 "만약 중이 되었거든 그냥 오너라"했다 한다. 왕명을 받은 자객이 남쪽으로 내려 오며 골짝 골짝을 샅샅히 뒤지면서 용산 땅에 와서 고얏골을 찾은 것이다. 그 때 이 아이(수성 신미) 는 이러한 위기를 미리 알아 30리 밖 백화산 넘어 반야사에 출가하여 이미 중이 되어 있었다 한다. 이 전설의 주인공이 바로 신미대사가 아니겠는가. (영산김씨 족보에 기록된 내용)

수성은 어려서부터 인물이 잘 나고 평소에 말을 잘 하지 않았으나 한번 말을 내 놓으면 청산 유수 같았고 , 눈을 부릅뜨면 안광에 기가 꺾여지지 않는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의 기품이 있어 관상학적으로 왕의 기상을 타고났다고 하니 총명함이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는데 글을 배우고 익혀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고 불가에 뜻이 있어 자칭 信眉라하여 머리 깎고 중이 되었다. 세종 26년에 다섯째 왕자 광평대군을 잃고, 27년에 또 일곱째 왕자 평원대군을 잃으니 비통함을 달랠 길이 없는 세종에게 28년에 왕비 소헌왕후가 승하함에 슬픔이 더욱 크셨다. 3년간에 세분을 잃으니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뉘우치던 중 병환으로 고통을 받을때 문종과 수양대군 등이 지성으로 시탕 하였으나 효력이 없던 바 신미로 하여금 약을 쓰니 快差하였다. 그로부터 세종은 信眉(秀庵)와 가까워졌고, 신미의 박식함에 감탄하고 인물됨에 惑하여 信眉에게 慧覺尊者의 號를 내리려 하였으나 병으로 내리지 못했던 것을 문종에게 諭敎를 내리니 문종은 선왕의 뜻을 받드러 왕에 오르자 賜號하니 禪敎宗 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佑國利世圓融無애 慧覺尊者라 했다. 특히 세조와는 수양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세조는 등극 후에도 꼭 존자라 칭하였고 국사로 모셨으며 세조 7년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신미를 우두머리로 효령대군과 김수온에게 불서를 언해하고 간행함이 100 여종에 이르렀다. 복천사를 비롯 오대산 상원사, 월정사, 락산사, 대자암등을 중건하고 국책으로 척불정책을 함에도 소신 것 불사에 힘썼으니 그 공이 지대하였다. 성종 10년 이후 涅槃에 오르니 보은 속리산 복천사(福泉菴) 남쪽 200m 지점에 秀庵 부도를 세웠으니 충청북도문화재 12호이다.  *복천암 사적비에 《훈민정음(한글) 창제시에 세종께서 신미대사를 집현전으로 불러 학자들에게 인도의 범어인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고 자문하여 훈민정음의 자형을 취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니 세계에서 으뜸이라는 우리 한글 창제에 큰 역할을 담당한 영동의 인물 신미대사의 얼이 담겨 있음을 큰 자랑으로 널리 알려야 되겠다.

*오대산 『상원사 중창 勸善文』은 國寶 292 號로 지정되어 신미(守省)와 괴애(守溫) 형제의 업적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그 외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으니 다음으로 이어지겠다.         *권선문 별지 참조


     * 첫번째 이야기 

朝鮮朝 第7代 世祖大王은 國初의 庶政을 바로 잡고 萬機를 親裁하기에 편안한 날이 없는 사이에 몸에는 지독한 피부병에 걸려 백방으로 손을 섰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보위에 오르기 위하여 여러 형제와 나이 어린 조카 단종을 해치고 어진 신하들을 학살한 세조는 만년에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회오의 길로 침잠하니 외로움과 허전함에서 정신적인 안식처를 구하려 하였다. 이때 생각난 이가 慧覺尊者 信眉大師였다. 신미는 도학과 학식이 뛰어난 당대의 학승으로서 福泉寺에 住錫하고 있었다. 신미대사의 초청을 받은 세조대왕은 천순8년 2월 28일 신숙주 이하 신하를 대동하고 청주에서 2박을 하고 장재리를 거쳐 말티재를 넘어 큰 소나무 아래까지 당도했다. 바로 길옆에는 이등변 삼각형의 아름드리 낙낙 장송이 가지를 길 위에 드리우고 있어서 대왕이 탄 연의 꼭지가 아마도 걸릴 것만 같았다. 이때 대왕은 연 위에서 손으로 소나무 가지를 가리키며 "아! 저 가지, 아! 저 가지" 이렇게 외치자 그 순간 늘어진 가지가 위로 슬그머니 쳐들었다 한다. 대왕은 신통히 여겨 즉석에서 正2品의 벼슬을 내리었다. 그래서 이 소나무를 正二品松이라하고 보물로 보호한다. 정이품송을 지나 복천사에 行幸한 세조대왕은 신미대사가 主宰하는 法會에 의지하여 티끌 많은 세상에 물든 자신의 심신이 부끄러움을 깨닫고 또 한편으로는 무한한 법열을 느꼈다. 이는 신미대사의 무변의 법력과 도심으로 濟度한 까닭이다. 세조대왕과 신미대사와는 水魚之交로서 평생을 은혜롭게 지냈다. 복천사서 법회를 마치고 아쉽게도 떠날 무렵 신미대사는 세조대왕에게 청원하기를 江原道 五坮山 上院寺에는 부처님(석가여래) 頂骨 舍利를 모신 寂滅寶宮이 있는데 歲久月深하여 심히 퇴락 하여 민망한 지경에 있으니 대왕께서 보궁을 중수하시면 그 공덕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간청하니 세조는 쾌히 승낙하였다. 이에 바로 學悅스님을 상원사로 보내어 중수를 마쳤고 6월에 낙성식을 가졌는데 이때 신미대사는 상원사에서 세조대왕을 초청하였다. 때는 5,6월 염천이라 날씨가 찌는 듯 하였고 대왕의 온 몸은 피부병이 더욱 악화되어 고통이 심했다. 그래서 신미가 대왕을 초청한 것이다. 낙성식에서 온 종일 땀을 흘린 대왕은 밤이 되자 절에서 마련한 목욕장에 들어가 몸을 씻는데 옥 같은 석간수에 들어가니 전신이 녹아 내릴 것 같이 시원하였다. 그리고 나이 어린 동자가 느닷없이 나타나 고운 두 손으로 등을 문지르니 심신이 날아갈듯 개운하고 시원했다. 더욱 고마운 것은 나이 어린 동자였다. 그래서 대왕은 등뒤에 있는 동자에게 나즉이 말을 건넸다. "얘 동자야! 너 어디에 사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고맙긴요. 저는 이 절에 살고 있어요. 대왕님" "아 그래 ,내가 너에게 부탁할게 있는데 들어 주겠나?" "예 대왕닌, 어느 존전 이라고 대왕님의 부탁을 마다하겠습니까? 무엇인지 하교하옵소서 대왕님!" "참으로 기특하구나 나의 부탁은 다름이 아니고 나의 몸에 손을 댔단 말을 남에게 절대로 하지 말라는 부탁이다" 세조대왕의 이 말은 중대한 뜻이 있다. 신하된 자가 옥체에 손을 대면 극형에 처하는 법이 있기에 동자의 신상이 염려되어 한 말이다. 그러자 동자는 대왕을 향하여 저도 대왕께 청이 있으니 꼭 들어 달라고 한다. 세조대왕은 나이도 어리고 조그만 놈이 청이 있단 말이 귀엽고 앙증스러워서 너의 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동자는 태연히 하는 말이 "대왕께서는 文殊菩薩이 現身하여 등을 문질렀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마세요. 꼭 약속이요" 하였다. 대왕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동자는 온데간데없어 기이하게 생각했고 피부병은 이때부터 치유가 되었다한다. 세조대왕은 신미대사의 도 력에 힘입어 복천사에서는 마음의 병이 치유되고 상원사에서는 육신의 병이 치유되었다. 지금도 상원사에는 세조대왕이 목욕했던 당시 현신 했던 문수보살의 상이 잘 모셔져있다.


       * 두번째 이야기 信眉大師의 慈悲와 道力

報恩하면 俗離山이요 俗離山에는 法住寺가 있고 有名한 菴子 福泉庵이 있다. 옛부터 법주사에는 고명한 스님들이 住錫하였기에 이 절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慧覺尊者 信眉大師가 한때 이 절에 住錫하며 面壁觀心으로 불도에 정진하고 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겨울날 밤에 이 절의 중진급 3,4명이 헐레벌떡 정신 없이 뛰어와 신미대사 수도장의 문을 두드리고 뵙기를 청하였다. 내용인즉 이러하다. 도둑 20 여명이 벌떼같이 절에 침입하여 젊은 중들을 묶어 놓고 장차 창고를 털 기세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높은 스님 信眉大師의 지시를 받으러 온 것이다. 이 놀랍고 끔찍한 말을 전한 스님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말도 제대로 못했다. 이런 뜻밖의 일을 당한 신미대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했다. "이 칠칠찮은 것들 떨기는 왜 떨어, 도둑이 떨 일이지 주인이 왜 떠느냐?"하고 꾸짖고는 명령을 내렸다. "모든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해라"하였다. 이 절에는 토지가 많아서 일년에 천여석의 곡식을 수확 할뿐 아니라 비단과 무명, 기명 잡화가 창고에 가득했었다. 이 말을 들은 도둑들은 마음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쌀과 비단 기명 무명 등 닥치는대로 멜빵이 끊어지도록 힘껏 짊어지고 도망을 쳤다. 긴긴 겨울밤이 뽀얗게 새도록 구슬땀을 흘리며 도망을 쳤는데 이게 웬 말인가, 밤새도록 죽을힘을 다하여 도망을 쳤건만 법주사 경내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밤새도록 법주사만 뺑뺑 돈 셈이다. 신미대사의 도 력에 잡힌 것이다. 이에 놀라고 당황한 도둑 떼들은 겁에 질려 솜같이 나른한 몸을 이끌고 신미대사 앞에 무릎 꿇고 살려달라 애원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신미대사는 태연히 도둑 떼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너희들의 눈을 보니 모두 착한 사람이다.

이 순간이라도 사악한 마음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왜들 이러느냐 마음을 바로 잡도록 하여라"라고 타 일렀다한다. 도둑들은 대사의 말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 앞에 회개하였다한다.


       * 세번째 이야기 

*삶은 달걀로...병아리를, 부적으로 100리 밖의 불을? 신미대사의 참 모습을 세속에 물든 범속한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名門大家에 태어나 탄탄한 벼슬길에서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항을 하던 金守省(信眉大師의 俗名)이 어찌하여 화려한 벼슬자리를 버리고 불도에 들어갔는지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분의 高祖는 高麗朝 末의 典客寺令 金令貽(永山金氏 始祖)이요, 曾祖는 版圖判書 永山府院君 金吉元이며 祖父는 贊成公 金宗敬이고 父는 太宗朝의 輔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贈領議政이다. 叔父는 兵曹參判이다.

金守省 자신은 深奧한 학문의 온축이 있어 학계의 泰斗로서 집현전에서 世宗大王의 총애를 받고 日就月將하던 그가 왜 불문에 입도 하여 승려가 되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고 불가에서 말한바 불제자가 되기란 오랜 전세에 積德이 있어야 한다지만 .........하여튼 金守省은 불도에 입문하여 信眉라 개명하고 面璧觀心으로 深奧한 진리를 탐구한 그는 稀代의 學僧이요 道僧이란 칭송을 받고있다. 집현전 학사라면 당시의 쟁쟁한 학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도학 또한 그러하였다. 그리고 신미대사가 언제 관계에서 손을 떼고 불문에 입도 했는지 그 년대도 미상이다. 집현전학사에서 사퇴하고 불도에 입문했다면 일생의 운명이 좌우되는 중대사인데 그럴만한 사연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다. 문제의 정답은 본인이 쥐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만 추측이 가능한 것은 집현전 학사에서 사퇴하고 불도에 입문했다면 연령이 30세쯤 되었을 것이고 일반적인 풍속이나 가정의 가풍으로 보아 이미 결혼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신미대사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많은 문제를 남긴다. 세조대왕의 한글 창제에 관여했다고도 하고 그의 아우 괴애 수온선생이 月印千江之曲을 지을   많은 협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이상의 의문들은 더 연구해서 규명하기로 하고 信眉大師가 白華山 너머의 般若寺에 주석했을때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般若寺는 용산면 상용리 고얏골(자택-오얏골)에서 약 30리 정도 떨어진 백화산 너머에 있는 신라때 창건한 고찰이다. 이때 생가에서는 반야사에 계시는 신미대사가 딱하고 안스러워서 겨울이 되면 새 솜옷을 지어서 보내기도 하고 계절 따라 신선한 과일과 맛있는 음식을 보내기도 했다. 집에서는 대사의 환속을 간절히 바랐지만 반석 같은 그 큰 뜻을 돌릴 수가 없었다. 뱁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리요.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는 늘 하던 대로 의복과 과일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생가에서 돌쇄(집에서 부리는 종)가 문안을 갔었다. 가지고 간 음식 중에는 송편이 있었는데 이 송편 속에는 팥고물 대신 계란의 노른자위를 이겨 넣어서 감쪽같이 빚었기  때문에 이 비밀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하면 중은 고기를 안먹기 때문에 송편으로 속여서 노른자위(고기)를 먹이고 파계시켜 환속을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어머님이 환속을 바랐으면 이렇게까지 했겠는가. 돌쇄는 가지간 송편을 쟁반에 맵시 있게 담아서 대사께 바쳤다. 대사는 말없이 송편 하나를 손바닥 위에 놓고 살살 문질렀다. 아! 이게 웬 일인가? 손바닥 위에 놓인 송편이 터지면서 노란 병아리가 삐약삐약 하며 나왔다. 참으로 대사의 도술은 대단했다. 대사는 이 후에도 면벽관심의 공적을 쌓아 마음의 눈으로 奧旨를 心解大惺하여 중생의 心田을 啓導하고 힘써 濟度했다고한다

대사께서 반야사에 주석 하실 때 또 이런 일이 있었다. 대사는 원래 蘊蓄이 풍부하여 천문과 지리에도 통달하였다. 하루는 저녁 후 앞뜰에 나서서 天氣를 살피니 報恩 俗離山 法住寺에 화기가 있어 위태로움을 보고 급히 주문을 외웠다. 이때 법주사에서는 수 백 명의 슬려가 한창 법회를 열고 강론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벼란간 난데없이 일진 강풍이 일어나 문짝을 두들기고 휑하게 지나가면서 한 장의 종이쪽지를 떨어뜨렸다. 승려들은 의아하여 그 종이쪽을 주워 보았다. 그 종이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 귀사 지붕에 불이 붙었으니 빨리 잡으라는 간단한 한마디의 글이 적혀 있었다. 승려들은 황급하여 나가보니 강당 처마 끝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이것을 본 승려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허둥지둥 아비규환이었고 불은 번져만 갔다.

이 광경을 관심으로 심찰한 대사는 "저런! 저런!" 이렇게 두어 마디 되 뇌이고 급히 부엌에 들어가 물종구라기로 물을 떠서 두어 방울 법주사를 향해 튕겼다. 이때 법주사에서는 때아닌 폭우가 쏟아져서 불길을 잡았다고 한다. 大師는 學僧이자 道僧이었다. 그러므로 세종대왕의 신임과 총애가 두터웠고 문종과 세조의 왕사로서 교화사업에 큰공을 세웠다.

출가 후 개명은 信眉 또는 如達 또는 秀庵(복천암에는 수암이라 썼다) 이라고 했고 世宗의 遺敎로 문종이 등극하자 "禪敎宗 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佑國利世 圓融無애(石변에 疑자) 慧覺尊者"(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라는 불교 최고의 존호를 내렸다. 신미대사는 억불숭유 하는 조선 국초의 유교 가문에 태어나 왕실과 손잡고 편협한 유학자들의 박해를 받아가며 불교 부흥에 노력했다. 한편 刊經都監을 주재하며 많은 불서를 국역했으니 우리 국어 발전에도 지대한 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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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알지계 김(金)씨의 유래

    60년(신라 탈해왕(脫解王) 4년) 8월4일 새벽에 어느 사람이 월성(경주)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밝은 빛이 계림(鷄林)에서 비치는것이 보여 가서보니 소나무 높은 가지에 금빛 찬란한 금궤가 걸려있고 아래에서 흰 수닭이 울고 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아뢰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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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자주성을 표현한 비문-영산김씨세장비 [永山金氏世葬碑]

    1987년 1월 15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영산김씨 23대손 김철(金澈)이 1919년 봄 상하이[上海]에서 입국하여 이 비문을 써놓았다고 한다. 그가 3·1운동에 참여하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간 뒤, 종중(宗中)에서 그해 10월에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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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문평공(文平公) 김수온(金守溫) 묘소

    조선초기(朝鮮初期)에 명성을 날린 영산 김씨(永山金氏)는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 길원(吉元)의 맏아들 종경(宗敬)이 고려 정종(定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우찬성(右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도총관(都摠管 : 오위도총부에서 군무를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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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영동(永同),영산

    http://www.genealogy.co.kr/soung1.htm영동(永同),영산 영동(永同)은 충청북도(忠淸北道) 최남단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시대에 길동군(吉同郡)이라 불리우다가 경덕왕(景德王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 때 영동(永同)으로 고쳤으며, 서기 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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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永山金氏淵源

    영산김씨(永山金氏)의 원조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이고 신무왕의 후손이다. 라, 여(羅, 麗) 양조에 걸쳐 출사입공해 오던중 고려말의 전객시령공이 영이 (令貽)는 쓰러져 가는 고구려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전력했으나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사직. 낙향할제 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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