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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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바래진 기억 속에
어렴풋한 사랑만이 남았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마지막인지 모른 채 마지막을 보낸다.
지나고 나서야 ‘아, 그게 마지막이었구나..’하곤 한다.
사람의 기억도 이와 같다. 지금도 조금씩 천천히 삭제되어 가고 있을 머릿속 기억들을 우리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다.
연말이 되면 으레 찾게 되는 영화 중 하나인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지워져 가는 기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짙어져 가는 사랑을 그린다.
글 서인하 일러스트 권예원
영화는 ‘조엘’의 평범한 아침과 함께 시작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출근길이지만 그는 알 도리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회사가 아닌 몬타우크행 기차에 오른다. 기차 안엔 자꾸만 눈이 마주치고 괜스레 신경이 쓰이는 파란 머리를 한 여자 ‘클라멘타인’이 있다. 용기를 내 먼저 다가온 ‘클라멘타인’ 덕분에 그 둘은 짧은 시간이 무색하게 가까워진다. 그는 한겨울에 꽁꽁 언 찰스 강 가는 걸 좋아하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생각한다. 그녀 역시 어린아이마냥 얼음이 깨질까 무서워하는 착하고 여린 마음을 가진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이건 이 둘의 첫 만남이 아니다.
이야기는 모든 게 멈춘 어제로 돌아간다. 사실 ‘조엘’과 ‘클라멘타인’은 오래된 연인이었다. 그 둘도 여느 연인들처럼 아기자기한 대화로 서로를 알아왔고 불완전하지만 충만한 사랑을 해왔다. 그러나 사랑의 형태가 언제나 일정할 순 없다. 때론 뭉근하기도 하고 조금 심술 난 사랑도 있는 법. 하지만 사랑 앞에서 언제나 조급해지는 우리는 종종 ‘나를 더 사랑해줘’라는 말을 날카롭고 뾰족한 말들로 바꾸어 상대를 괴롭히곤 한다. ‘조엘’과 ‘클라멘타인’도 그랬던 것일까. 아득하게 쌓여진 오해 앞에 속수무책인 그들은 급기야 기억을 지워준다는 병원을 찾아 서로의 기억을 지우기로 한다.
영화는 ‘조엘’의 최근 기억부터 ‘클라멘타인’과의 첫 만남까지 역순으로 흘러간다. 사실 ‘조엘’은 ‘클라멘타인’과의 아팠던 기억들만을 지우고자 한 건데, 이 사실을 그 스스로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왜 헤어지고 나면 화나고 미웠던 기억은 점점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변해 가는 걸까? 기억이 지워져 가는 과정에서야 그는 깨닫는다. 그녀와의 추억 속엔 잊고 싶지 않은 수많은 바래진 기억들 역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잊혀지는 아픔보다 잊어가는 아픔이 더 잔인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된 ‘조엘’은 “이 기억만큼은 남겨주세요!”라고 울부짖지만 이미 그의 손아귀 밖의 일이다. 그는 ‘클라멘타인’과의 추억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와 자신의 기억 속으로 숨어도 보지만 결국 그의 기억회로는 그녀를 처음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다.
이제 서로에 대한 어떤 기억도 없는 둘. 하지만 그들은 몬타우크행 기차 안에서 우연히 재회하고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끌려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계속 떠들어야 마음이 전해지는 건 아니라는 ‘조엘’과 마음은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클레멘타인’ 그들 사이엔 닮은 구석이라곤 없지만, 다시 한 번을 외치는 그들의 마음엔 망설임이 없다. 둘의 마지막 대화가 참 인상 깊다.
“우린 분명 다시 지루해지고 서로가 거슬려질지도 몰라요. 하지만 뭐 어때요. 난 상관 안 해요.” 그래, 어쩌면 사랑이 조금 불안하고 복잡해도 나쁘진 않다 싶다. 티 없는 마음엔 영원한 햇살이 들기 마련이니까.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