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인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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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NIGHT FANTASY
아무래도 난 너무 늦게 태어난 게 아닐까 싶다.
살아 본 적 없는 시대에 막연한 환상을 갖는 것.
그래서 과거에 태어났다면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거라 여기게 되는 것.
그것만큼 현실을 살아가는 나에게 무력감을 주는 것도
없지만 오늘을 낭만적으로 만드는 것도 없다.
영화 속 아드리아나가 무심하게 친 대사가 마음에 든다.
“저한테 과거는 큰 마력이 있거든요.”
글 라어진 일러스트 권예원
Paris in the 1920’s
누구에게나 황금시대란 게 있다. 할리우드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길’은 약혼녀 ‘이네즈’와 함께 여행차 파리에 왔다. 그에게 있어 파리는, 특히 예술의 거장들이 살았던 1920년대의 파리는 막연한 환상의 종착역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저길 좀 봐! 정말 끝내준다. 비 내리는 파리라니.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는 세상에 다시없을 거야. 1920년대의 이 도시를 상상해봐. 빗속을 걸었을 작가들과 화가들을!”
모네가 보고 그렸을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숨길 수가 없는 낭만주의자 길과는 달리, 21세기 파리의 화려함을 좋아할 뿐인 현실주의자 이네즈는 너무나도 상반된 취향을 가지고 있다. 결국 비록 둘은 함께 파리에 왔지만, 서로 다른 파리의 매력을 찾아 흩어져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하는데.
그렇게 홀로 예술의 혼이 깃든 파리의 거리를 배회하던 길. 우연히 자정의 종소리와 함께 등장한 클래식한 푸조 한 대에 올라타게 된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한 파티장. 고전풍의 의상을 어색함 없이 걸친 사람들과 음악과 파티장을 아우르는 공기까지. 어쩐지 이상한 느낌을 주는 그곳에서 자신을 ‘스콧 피츠제럴드’와 ‘젤다’라 소개하는 커플을 만난다. 그렇다. 그곳은 길이 그토록 동경하던 1920년대의 파리였던 것(타임 슬립이라는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되었지만, 영화는 그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스콧 피츠제럴드부터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루이스 부뉴엘, 만 레이, 거트루드 스타인, 콜 포터까지. 모두가 그 파티장에 있었다. 그날 이후로 길은 매일 밤 자정이면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예술의 거장들이 잔뜩 살고 있는 1920년대의 파리를 목적지 삼은 클래식 푸조를 타고서.
현실주의자 사이에서 낭만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
낭만과 예술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그들과의 만남은 지극히 퍽퍽했던 길의 현실에 한 줄기 빛과 다름없었으리라. (피카소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아드리아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길은 현실에서는 외면받기 십상이던 자신의 글을 흥미롭게 읽어주는 그녀에게 자연스러운 호감을 품게 된다. 그렇게 1920년대의 파리를 걸으며 데이트를 즐기던 길과 아드리아나. 이윽고 그들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서고 어디론가 인도하는데. 마차가 멈춰 선 곳은 다름 아닌 Maxim 레스토랑(예술가 및 각종 유명인들의 사교장 겸 레스토랑. 1893년 처음 문을 열었다). 그렇다. 이번엔 아드리아나가 동경해왔던 벨에포크 시대(1890년대)로 이동한 것. 놀랍게도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폴 고갱과 앙리 드 톨루즈 로트레크, 에드가 드가. 모두 아드리아나의 오랜 뮤즈다. 1890년대는 그녀에겐 더없이 충만한 시대겠지만, 정작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은 역시나 ‘이 시대는 공허하고 상상력이 없다. 진정한 황금시대는 르네상스 시대’라 말할 뿐이다. 결국 길은 ‘과거에 대한 동경’은 시대를 불문하고 있어왔단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사람들을 봐요. 이 사람들의 황금기는 또 르네상스예요. 이들은 미켈란젤로와 같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고 있어요. 미켈란젤로는 또 쿠빌라이 칸 시기를 동경할 걸요?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그렇다. 척박하게만 느껴지는 현실 역시 언젠가는 과거가 되고, 그 과거는 미래의 누군가에겐 황금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현실을 사랑하는 건 언제까지나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과거에 대한 향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 하는 사람들의 허점이지’하는 식의 훈계를 두는 것도 이상하다. 누구나 경험해보지 못 한 것에는 일말의 환상을 가지기 마련이니, 과거를 동경하는 것, 그건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은 과거가 됐든 현재가 됐든, 내가 사랑하는 특정 시기가 있고 그 시기를 떠올리며 느낄 수 있는 낭만이 있음이 중요한 게 아닐까. 그러니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시절은 어제이기도 하고, 어제가 될 오늘이기도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