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My Liff

자유롭게 피어나기...

선조께서 왕명을 받아 지었다고 전해지는 월인천강지곡

by 월간김현청 posted Jun 19, 200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조선 세종이 1449년(세종 31)에 지은 불교 찬가(讚歌)로, 보물 제398호. 1447년에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올리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이다. 그러나 왕의 측근이셨던 김수온(金守溫)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이라는 설(說)도 있다. 《월인천강지곡》이란, 부처가 나서 교화한 자취를 칭송한 노래라는 뜻으로, 상 ·중 ·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아울러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한국 최고(最古)의 가사(歌詞)이다.





현대어 풀이


其一
<풀이>
높고 큰 석가불의 끝없는 공덕을 이 세상 다하도록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其二
<풀이>
부처님의 하신 일을 말씀드리니, 만 리나 떨어진 곳의 일이시나 눈에 보는 듯이 여기십시오. 부처님의 하신 말씀을 사뢰리니, 천 년 전의 말씀이시나 귀에 듣는 듯이 여기십시오.

其三
<풀이>
먼먼 전 세상에 (전생의 석가모니가) 임금 자리를 버리고 불도를 닦는 정사 앞에 앉아 게셨다. 오백 명의 전 세상 원수가 나라의 공물을 훔치고 지나갔다.

其四
<풀이>
(왕은 정사에 앉아 있는 보살이) 형님인 줄 모르므로, 발자취를 밟아가서 (보살이 도둑인 줄 알고 잡아다가) 나무에 몸을 꿰어 (화살로 쏘아) 목숨을 마치게 하셨다. (보살 소구담이) 자식이 없으므로 (대구담이) 그의 피를 모아 그릇에 담아서 남녀를 태어나게 하셨다. (소구담의 대를 감자씨가 이음)


또 다른 전문 풀이

[其一] 높고 큰 석가모니 부처의 그지없고 가이없는 공덕을 이 세상 다 할 때까지 어찌 다 아뢰겠습니까.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아뢰고 아뢰어도 능히 다 아뢸 수가 없을 만큼 높고 크십니다)

[其二] 석가 세존의 하신 일을 말씀드릴 것이니 (우리 나라에서) 만 리나 떨어진 곳 (인도에서 일어난)의 일이지만 눈에 보는 것같이 여기소서.

   석가 세존의 하신 말씀을 사뢸 것이니, 천 년 전에 하신 말씀이시지만, 귀에 듣는 듯이 여기소서.

[其三] 헤아릴 수 없는 먼먼 전 세상 시절에(한 보살이 ; 전생의 석가모니가) 임금의 자리를 버리시고 (도를 닦기 위하여) 정사(精舍)에 앉으시었습니다.

   오백 명의 전 세상 시절 원수가 (도둑으로 태어나) 나라의 공물(公物)을 훔쳐 가지고 정사 앞을 지나갔습니다.

[其 四]

왕은 정사에 앉아 있는 보살이) 형님인 줄 모르므로 (도둑의)발자취를 밟아가서 (보살을 잡아다가) 나무에 몸을 꿰어 (화살로 쏘아) 목숨을 마치게 하시니, (보살 소구담이) 자식이 없으므로 (대구담이 보살의) 피를 모아 그릇에 담아서 남녀를 태어나게 하셨다.

요점 정리

의미 :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춘다는 말로 석가모니가 중생을 교화함을 말함
연대
창작 : 세종 29년 (1447) 추정 ('석보상절'과 거의 같은 시기임)
간행 : 세종 31년 (1449)
작자 : 세종대왕
형식 : 악장, 서사시
내용 : 석가모니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 찬불가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찬불가(讚佛歌)이므로 궁중 음악에서는 사용 안됨
상, 중, 하 3권으로 간행되었는데 이 중 상권만이 발견되었다. 수록 작품은 모두 194장이나 이로 미루어 볼 때 전편은 580여 장이 될 것으로 추측됨.
제작동기 :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 바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세종께서 보시고 이 글을 지었음(두 500여 곡으로 된 3권의 활자본. 현재 상권 1책이 보물 398호로 지정)
의의
용비어천가와 함께 대표적인 신체 악장, 최대의 서사시(敍事詩)
15세기 국어의 귀중한 자료
불교문학의 정화(精華)
표기에 한글을 위주로 하여 한자를 협주로 한 점으로써 한글전용이 행해진 최초의 문헌으로 일컬어진다
참고 : <월린천강지곡>을 세조 5년에 '석보상절(釋譜詳節)'과 합본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라는 이름으로 간행함

이해와 감상

'월인천강지곡'의 '월인천강'은 밝은 달이 이 세상의 모든 강물에 고루 다 비친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교화(敎化)가 온 세상에 가득함을 비유한 말이다. '其一'과 '其二'는  함께 '월인천강지곡'의 서장(序章)이다.

'其一'은 '용비어천가' 제 1장처럼 형식상 파격을 가져온 장으로 설의법과 과장법을 동원하여 끝없이 넓고 크신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였고,

'其二'는 2절 4구의 형식 을 갖추어 '용비어천가'와 같은 악장체 문학의 정형을 이루었다. 시간적·공간적으로  멀고 아득한 석가 세존의 말씀과 행적을 아뢸 것이니, 현세에서 보고 듣는 듯이 여기라는 내용이다.  

'其三'은 석가 세존이 태어나기 전 세상의 이야기로, 구담씨(瞿曇氏)의 내력을 밝힌 내용이다. 이렇듯 '월인천강지곡'의 내용은 불교의 연(緣)을 중심으로 한 윤회 사상(輪廻思想)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인천강지곡'의 배경 설화  

헤아릴 수 없는 먼먼 전 세상 시절에 한 보살이 임금으로 있다가 왕위[王位]를 아우에게 맡기고, 부처의 도리를 배우러 출가하여 구담 바라문(瞿曇拍羅門)을 만나 자기의 옷[王位]을 벗고 구담의 떨어진 옷을 입고 깊은 산에 들어가 과실과 물을 잡수시고 좌선(坐禪)하시다가 자기가 다스리던 나라에 걸식(乞食) 하러 내려오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왕인 줄 몰라보고, 다만 구담의 제자라 소구담이라고 했다. 이 보살이 성 밖의 사탕수수밭에 불도를 닦는 정사를 만들어 혼자 좌선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마침 500명이나 되는 도둑 떼가 나라의 제물을 훔쳐 가지고 보살이 좌선하고 있는 정사 앞을 지나갔는데, 이들은 보살의 500세(世)전의 원수였다.

참고 자료

조선 세종이 1449년(세종 31)에 지은 불교 찬가(讚歌).

보물 제398호. 1447년에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올리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이다. 그러나 왕의 측근이었던 김수온(金守溫)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이라는 설(說)도 있다. 《월인천강지곡》이란, 부처가 나서 교화한 자취를 칭송한 노래라는 뜻으로, 상 ·중 ·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아울러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한국 최고(最古)의 가사(歌詞)이다.

이 책의 표기법에 관하여 몇 가지 두드러진 점을 들어보면, ① 당시의 맞춤법은 모두 표음(表音)의 원칙, 즉 소리나는 대로 적는 원칙에 따랐다. 곧, ‘사ㆄ미怠,바翠(食), 머그니(食), 마가(防)…’ 식으로 풀이씨(用言)와 줄기(語幹)와 씨끝(語尾)과의 구분이 지켜지지 않고 표기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일이시나, 눈에, 말이시나, 일흠은, 담아, 안아, 안굼시니이다, 낮과, 곶우흰, 곶비, 맞나겝側며, 깊거다… ’ 등으로 비교적 현대 문법과 가깝다. ② 다른 문헌이 한자(漢字)를 앞세우고 그 밑에 한글로 음을 다는 표기법을 채택하고 있음에 비하여, 이 책은 그 위치가 반대로서 한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한글을 사용하려는 주체성(主體性)의 발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③ 종성(終聲)이 없는 자리에 ‘ㅇ’을 붙이던 당시의 한자음 표기법을 볼 수 없다는 점 등이다.

이는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및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 등과 함께 정음 창제 당시의 언어연구로서 빼지 못할 자료가 되지만, 《월인천강지곡》의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예술적인 독창성의 결여 때문에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는 못하고 있다. 《월인천강지곡》은 산일되어 상권만이 전하다가 1961년 진기홍(陳錤洪)에 의하여 발견되어 3권으로 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1962년에 통문관(通文館)과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에서 각각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또한 1995년 12월 발견된 《월인석보(月印釋譜)》 권25에 새로운 《월인천강지곡》의 시 7수가 수록되었음이 확인되었다.




?

  1. 永山山脈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永山山脈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1. 서라벌에서 永同으로 영산김씨(永山金氏)의 뿌리를 알려면 먼저 대보공(大輔公) 휘(諱) 알지(閼智)의 탄생 설화로부터 시작된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나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제4대 석탈해왕 9년(中國...
    By월간김현청 Views4810
    Read More
  2. 국보 제278호

    국보 제278호 명 칭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太宗十一年李衡原從功臣錄券附函) 분 류 기록유산 / 문서류/ 국왕문서/ 교령류 수량/면적 일괄(녹권1축,함1점) 지 정 일 1993.04.27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국립고궁박물관 보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이...
    By월간김현청 Views2129
    Read More
  3. 혜각존자의도력진헌

    慧覺尊者 金守省(信眉大師)의 道力 金振憲 守省은 金訓의 長子로 西記 1403年(朝鮮 太宗3年 癸未)에 태어났다. 始祖 金令貽가 高祖, 金吉元이 曾祖, 金宗敬이 祖父이시다. 태어날 때부터 왼손 손바닥에 임금 王字가 손금에 있어 父母와 三寸들은 크나큰 걱정이...
    By월간김현청 Views2033
    Read More
  4. 신미대사(수성 수암)와 반야사

    신미대사(수성 수암)와 반야사 김동현 1. 명당인 생가 신미대사는 신라 45대 신무왕의 넷째 왕자공 익자광자(益光)의 후손 영산(영동)김씨 관조이신 영자이자(令貽)의 고손(5세손)으로 증조부가 고려조 판도판서 영산부원군 길자원자(吉元)이며 조부는 조선조 ...
    By월간김현청 Views2504
    Read More
  5. 영산김씨(永山金氏)

    1. 시조(始祖) : 김익광(金益光)(22세)(김알지공(1세) 관조(貫祖) : 김영이(金永貽)(45세, 23세)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영동(永同)은 충북 최남단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시대에 길동군이라 불리우다가 경덕왕때 영동으로 고쳤으며,1413년경상도로부터 충청...
    By월간김현청 Views3646
    Read More
  6.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79)의 일생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79). 조선전기의 승려, 유.불학자 1. 내 용 [img1]충북 영동에서 부친 김훈(金訓)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유학자이며 숭불을 주장한 김수온(金守溫) 의 형님으로 본명이 수성(守省),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처음에 법주사에 출가...
    By월간김현청 Views3034
    Read More
  7. 의문 투성이 한글기원... 신미스님이 열쇠

    한글기원과 신미대사 성현-이수광-이능화의 梵字 기원설과 부합 <사진설명>훈민정음 보급의 일등공신 신미 대사는 범자(梵字)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했다.(좌) 그러나 유학자들의 질시로 그가 번역한 경전마저 나중에는 삭제되는 비운을 맞는다. 초판본(中). 초...
    By월간김현청 Views3116
    Read More
  8. 세조와 신미대사

    보은미래신문 신미선사는 충청북도 영동의 영산김씨 가문에서 부친 김훈과 모친 여흥이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img1]출가 입산 전에 부친께서 진사벼슬에 등과한 후 태종 때에 영의정까지 지낼 수 있는 귀족가문 출신이기에 속가에서 사서삼경을 모두 섭...
    By월간김현청 Views3358
    Read More
  9. 세조가 신미대사에게 “내가 왕이 된 것은 오직 대사의 공”

    세조가 신미대사에게 “내가 왕이 된 것은 오직 대사의 공” [img1]순행(巡行) 후 서로 있는 곳이 멀어지니 직접 목소리를 듣고 인사드리는 일도 이제 아득해졌습니다. 나라에 일이 많고 번거로움도 많다보니 제 몸의 조화가 깨지고 일도 늦어집니다. 그렇다고 ...
    By월간김현청 Views3213
    Read More
  10. 속리산 복천암-신미대사와 한글 창제

    속리산 복천암 산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천년고찰(千年古刹)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한반도의 한가운데는 충북 지역이고, 충북에서도 속리산(俗離山)이다. 한국의 중심에 속리산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속리산에서 보은(報恩) 쪽으로 흘러간 물은 금강에 ...
    By월간김현청 Views3073
    Read More
  11. 영산김씨 선조인 ‘신미대사(1403~1480)의 한글 창제설’

    [조용헌살롱] 신미(信眉)대사와 한글 [조선일보] 속리산 복천암에 전해져 오는 ‘신미대사(1403~1480) 한글 창제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신미(信眉)는 속성(俗姓)이 영산김씨(永山金氏)인데, 영산김씨 족보를 추적해보면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득총어세...
    By월간김현청 Views3236
    Read More
  12.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만든 고려사에 불교신봉자들의 사적을 다 기록했는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만든 고려사에 불교신봉자들의 사적을 다 기록했는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는 이성계의 역성 혁명 후 조선 태조가 되어 정도전에게 명하여 편찬하기 시작하였는데 고려 왕조실록 등의 문헌을 보고 고려조를 살아온 학자들에 의하...
    By월간김현청 Views2853
    Read More
  13. 영산(영동)김씨족보의 건

    김현청 선생님 ! 안녕하세요. 이 자리에 이런글을 올려도 되는지 무례를 무릅쓰고 올립니다. 전 영동(永同),영산김씨와 결혼을 하여 아들 둘을 둔 가장으로 처가에 보관된 족보가 없어 아들에게 외가의 집안 이야길 해주고 싶어도 못하고 , 제 처는 집안 역사...
    By안영모 Views6317
    Read More
  14. 선조께서 왕명을 받아 지었다고 전해지는 월인천강지곡

    조선 세종이 1449년(세종 31)에 지은 불교 찬가(讚歌)로, 보물 제398호. 1447년에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올리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이다. 그러나 왕...
    By월간김현청 Views4662
    Read More
  15. 기산팔경(箕山八景) - (氷玉亭)

    ***高麗 末의 中顯大夫 典客寺令 永山君 金令貽는 難國을 求하려고 重臣들과 힘을 합쳐 온갖 힘을 다 했으나 기울어진 國運이 李氏에게로 기울어 두 아들 吉元과 苞와 세 사위(長壻-順天人 朴元龍 吏部侍郞, 次壻-求禮人 張丕 漢城判尹, 四壻 密陽人 朴時庸 大...
    By월간김현청 Views3431
    Read More
  16. 알지계 김(金)씨의 유래

    60년(신라 탈해왕(脫解王) 4년) 8월4일 새벽에 어느 사람이 월성(경주)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밝은 빛이 계림(鷄林)에서 비치는것이 보여 가서보니 소나무 높은 가지에 금빛 찬란한 금궤가 걸려있고 아래에서 흰 수닭이 울고 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아뢰었...
    By월간김현청 Views3716
    Read More
  17.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자주성을 표현한 비문-영산김씨세장비 [永山金氏世葬碑]

    1987년 1월 15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영산김씨 23대손 김철(金澈)이 1919년 봄 상하이[上海]에서 입국하여 이 비문을 써놓았다고 한다. 그가 3·1운동에 참여하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간 뒤, 종중(宗中)에서 그해 10월에 이 비를 세웠다....
    By월간김현청 Views3395
    Read More
  18. 문평공(文平公) 김수온(金守溫) 묘소

    조선초기(朝鮮初期)에 명성을 날린 영산 김씨(永山金氏)는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 길원(吉元)의 맏아들 종경(宗敬)이 고려 정종(定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우찬성(右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도총관(都摠管 : 오위도총부에서 군무를 총...
    By월간김현청 Views3662
    Read More
  19. 영동(永同),영산

    http://www.genealogy.co.kr/soung1.htm영동(永同),영산 영동(永同)은 충청북도(忠淸北道) 최남단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시대에 길동군(吉同郡)이라 불리우다가 경덕왕(景德王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 때 영동(永同)으로 고쳤으며, 서기 995년(...
    By월간김현청 Views3455
    Read More
  20. 永山金氏淵源

    영산김씨(永山金氏)의 원조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이고 신무왕의 후손이다. 라, 여(羅, 麗) 양조에 걸쳐 출사입공해 오던중 고려말의 전객시령공이 영이 (令貽)는 쓰러져 가는 고구려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전력했으나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사직. 낙향할제 두 ...
    By월간김현청 Views3212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